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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삼정지기
댓글 0건 조회 446회 작성일 17-06-19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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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능을 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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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법인 삼동회 삼정원장
성산 김 영 주(도영)

 


 

 

 


 

익산에는 쌍능이 있다. 722번 지방도로를 타고 익산 IC방향을 향해 가다가 팔봉을 지나다 보면 왼쪽에 쌍능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고, 그 옆길로 800m쯤 들어가면 왼쪽에 직경 30m, 높이 5m 크기의 대왕묘가 자리하고 있다. 거기에서 100여m쯤 남쪽으로 가면 또 하나의 묘가 나오는데.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어 쌍능이라고 부른다. 이 능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16년 3월 왜구의 노략질로 여러 번 도굴된 바 있으며, 일본인이었던 세기노씨(關野氏)가 대정육년(大正六年)인 1917년에 학술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조선 고적 도보(朝鮮古蹟圖報)에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능의 양식은 백제 말기의 부여 능산리 5호분의 수법과 같고 원형 봉토의 주위에 괴석(塊石)을 두른 석렬의 흔적이 있고, 전형적인 백제고분 양식(百濟古墳樣式)인 횡혈식 석실분으로 축조되었고 조성시기가 7세기 전반으로 밝혀졌다. 석곽(石槨)은 화강석으로 된 대판석(大板石)으로 짰으며 현실(玄室) 앞에는 단면 사각형의 연도가 있고 장방형의 큰 판석으로 현실 입구를 막았다. 현실은 단면 육각형의 간단한 말각천정식(抹角天井式)을 갖는 평면 장방형의 석실로서 석실 중앙에 화강석으로 만든 관대(棺臺)가 있고 그 위에 위쪽이 넓고 아래쪽이 좁으며 둥근 뚜껑을 덮은 목판을 올려놓아 백제 말기의 왕릉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익산시는 이 곳 쌍능에 생태공원을 조성하였다. 금마지역은 마한 백제의 고도로써 역사와 문화가 있는 곳이기에 거기에 주민들의 생활환경개선과 복지증진과 역사, 교육, 문화 및 관광산업의 종합적 발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쌍능 생태공원이 시름시름 앓고 있다.

 


 

필자는 쌍능에서 800m 정도 떨어진 서고도리에 살아 건강을 위해 산책코스로 활용하고 있어 이러한 공원이 주변에 있다는 것에 고맙기도 하고 뿌듯하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그 공원이 죽어가고 있음에 가슴이 아프다. 7년 전에 이한수 시장 재직 시에 직접 시장님께 쌍능 관리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 바 있으나 지금의 공원은 폐허에 가깝도록 방치해 있고, 잡초들의 놀이장이 되었다.

 


 

잘 지어진 정자는 오래된 빈집처럼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 저기 부패되어가고 있으며, 지주대로 받혀진 큰 나무들도 전정이 되지 않아 자기 멋대로 자리하고 있다. 오월을 아름다움으로 물들이는 철쭉은 다른 잡초들과 또는 칡넝쿨과 함께 엉켜 있으며, 쉬어가는 벤치는 칠이 벗겨져 흉물스럽게 변해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제일 큰 문제는 길이다. 블록으로 만들어진 예쁜 길들은 블록 사이로 비집고 나온 억센 풀들로 인해 길의 목적을 상실하고 있다. 다만 일 년에 두어 번 예취기로 잡초를 깍는 작업만 진행되고 있음을 본다.

 


 

가장 큰 문제는 관리인이 없다는 것이다. 관리사무소는 있으나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관리실 문은 늘 잠겨져 있고, 화장실은 접근하기 싫은 악취가 코를 후빈다.

 


 

시민의 혈세로 시민들을 위해 만들어진 생태공원! 주무부서의 관리소홀로 흉물스럽게 변해가고 있는 모습에서 익산시를 본다. 원래의 목적과는 거리가 먼 행정으로 어쩌면 애물단지로 변하지 않을까 싶다. 방치해도 너무 방치했다. 공원이 다시 원래대로 태어나려면 엄청난 혈세가 또 투입되어야 한다. 그런다고 보면 관계부서는 공원관리의 소홀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내 개인의 정원이었다면 어찌했을까? 시민을 위한 행정이 이런 모습일까? 많은 상념을 해본다.

 


 

익산은 무왕의 도시이다. 특히 쌍능은 무왕의 탄생과 시대와 국가를 초월한 로맨스의 땅이다. 백제는 삼천궁녀로 유명한 의자 왕대에 신라에게 멸망을 당하게 되는데 무왕은 바로 의자왕의 전대 왕으로 시기적으로는 백제 말기의 왕이다. '삼국유사'에는 이미 드라마나 출판 매체를 통해서 많이 알려진 무왕의 탄생 설화가 남아있다. “어머니가 과부로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못 속의 용과 교통하여 무왕을 낳았고, 어렸을 적 이름이 서동인 그의 기량을 헤아릴 수 없었으며 마를 캐어서 그것을 팔아 생활을 하다가 미모가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선화공주와의 사랑을 동요로 만들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여 선화공주와 결혼하게 됐다”는 내용이다. 설화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두고도 많은 설이 존재하지만 ‘그만큼 많은 우여곡절 끝에 30대 왕이 되었다’는 것은 공통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30대 왕으로 즉위한 무왕은 왕권을 회복하고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을 것이고, 그 방편의 하나로 익산을 대단히 중요시 여겼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익산! 역사적인 쌍능의 공원이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지역의 편안한 안식처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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